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사제 시기 ==== 루터는 '청빈, 정결, 순명'[* 이 3가지를 복음삼덕이라고 한다.]이라는 전통적인 수도생활에 전력했다. 오히려 규율을 너무 철저히 지켜서 문제가 되었다. 철저하고 엄격하기 그지없는 수도생활을 하면서도 "이 정도론 구원받기에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졌고, 근심과 걱정이 계속되었다. 사흘 동안 빵 부스러기도 먹지 않는 금식기도를 하거나, 1주일 동안 밤잠을 안 자고 철야기도로 밤을 지새울 정도였다. 루터에게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느냐 하는 큰 고민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루터의 장상이자 고해신부였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1460년- 1524년) 신부는, 악마에 사로잡혔다는 악몽에 고생하는 루터에게 '''"자네의 하찮은 죄는 그냥 두게! 하느님께서 자네에게 벌주는 게 아니라, 자네가 하느님께 화를 내는 게 아닌가!"'''라며 루터를 진정시키기는 한편, 다른 방법으로 루터에게 신비주의 서적과 [[성경]]을 연구해 볼 것을 권했다. 슈타우피츠의 권유에 따라 신비주의 서적에는 잠시 공감을 표했다가 신학적 방향이 다름을 깨닫고 멀어졌고, 루터는 [[사도 바울]]의 서간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510년]] 11월 수도자 신분으로 [[수도회]]의 업무 처리를 위해 6개월간 여행했고, 그 와중에 [[로마]] 순례도 했다. 4주간 로마에 머무르며 당시 순례객들이 행하던 대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40여구의 [[교황]]들의 유해와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를 비롯한 7만 4천여 구의 [[순교자]]의 성유물,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고 제사장으로부터 받은 은화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레오 10세]]는 유해마다 4,000년, 은화는 1,400년의 면벌효과가 있다고 선언했다.] [[바티칸]] [[교황청]]의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일명 '[[본디오 빌라도]]의 계단'이라 불리는 28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며 무릎을 꿇고 기어오르기도 했다.[* 지금도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이런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계단에 오르면서도 '''"이것이 진짜일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라 생각했고, 마지막 계단 위에 오르고서도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훗날 발표하게 되는 신학적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로마 교황은 [[율리오 2세]]였는데 세금 안 내고 [[교황령]]을 점령한 신자(베네치아)들을 갑옷 입고 말 탄 채로 친히 정벌 중이라서 먼발치에서라도 보진 못했다.] 그러던 중 [[로마서]]의 1장 17절,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구절을 수년간 붙잡고 늘어진 끝에 그의 갈증은 일거에 해결되었다.[* 일명 탑 체험이라고 하는데, 시기에 따른 논란은 있는데 1505년, 1512년, 1518년설까지 있다. 보통은 1512년으로 본다.] 점점 "인간이 어떤 선행을 한다거나 자신의 힘으로 죄를 씻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이를 '[[이신칭의]]' 또는 의인(義認)라고 한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칭해진다 또는 인정받는다는 뜻이다.]."는 생각을 점점 굳혀나갔다.[* [[가톨릭]] 역시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스스로의 선행이나 수행의 결과로 얻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용어와 개념 특히 인간론에서 차이가 있다.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라틴어로는 justificare, 영어로는 Justification으로 한국어 번역은 개신교에선 이신칭의는 가톨릭에선 의화로 번역한다. 자세한 건 [[이신칭의]], [[로마서]] 항목 등 참조.] 루터는 [[에어푸르트]]를 떠나기 싫었으나 스승이자 상관 슈타우피츠가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작센)|프리드리히 3세]]의 요청에 따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기에 같이 따라서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역시 슈타우피츠와 대학의 요청으로 1508년부터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강사로 임용되어 강의를 하게 되었다. 에어푸르트 대학교 시절에도 철학학위가 있기에 수사학, [[라틴어]], [[그리스어]]의 학문적인 기초는 있었고 이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509년부터는 성서학 박사(Doktor der Heiligen Schrift) 과정을 이수했고, 1512년에는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 해에는 교수로도 임용된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 중에서도 고학력에 속했기 때문에, 다른 사제들로부터 루터의 사제서품과 진급이 너무 빠르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부제에서 사제서품까지 겨우 2달 만에 될 정도.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사제 시절, 루터의 장상이자 고해신부였던 요하네스 폰 슈타우피츠 신부는 개혁 성향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슈타우피츠 신부의 지원을 받아 수도회 내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았고 대학에서도 신학적으로 존경받았다. 1515년 루터는 자신이 몸 담은 '검은 수도원'을 비롯해 독일 내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 수도회의 학문연구 책임자 겸 11개 수도원을 감독하는 직위에까지 올랐다. (슈타우피츠는 [[아우구스티노회]] 독일관구 전체를 총괄하는 주교대리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